[투데이 창]당신의 시간에 빚을 지고

유재연 옐로우독 파트너 기사 입력 2025.03.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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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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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학부생 마흔 명과 함께 프로젝트 기반 수업을 하고 있다. 소셜벤처 및 비영리재단과 짝을 지어 고객의 문제를 푸는 프로덕트를 한 학기 동안 설계하고 만들어 내는 수업이다. 삼삼오오 팀을 이룬 학생들은 교실에서 사용자 리서치 방법과 AI(인공지능) 도구 활용법 등을 배워 현장으로 나간다. 개강 이후 지난 3주 차까지 이론 수업과 현장 실습 설계를 마무리한 학생들은 그동안 구축한 가설과 질문거리를 잔뜩 들고 실제 고객을 만나러 간다. 만남 이후에는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 제품 설계를 하게 된다.

여덟 개 팀이 각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질문을 읽고 여기에 댓글을 달면서 낯선 이를 만나러 가기 전 한결 같이 느꼈던 콩닥콩닥함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누군가의 시간에 빚을 지고, 온전히 내가 그 순간들을 주도하며 의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부담감. 그 분초를 촘촘하게 엮어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기사로 만들어내고, 가치 있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고, 고객이 지갑을 열 징후를 찾아내는 것이 그러한 만남들의 목표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나만의 가설이 있어야 하고, 그 가설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과 해결법들을 빼곡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기존의 기사, 논문, 제품과는 다른 나만의 차별성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그 차별화된 지점이 정말 고객들이 원하는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가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생각보다 많은 창업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특정 고객이 어느 행동을 하는 과정(user journey) 안에서 큰 불편을 겪고 있고, 이걸 돈을 내더라도 기꺼이 해결하고 싶은 순간(pain point)을 뾰족하게 찾아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당연한 이론이지만 묘하게 종종 잊히곤 한다. 이것을 정의내릴 수 있어야, 해당 고객군의 규모, 고객이 지불할 수 있는 여력과 시장 크기, 확장 가능성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이로써 회사가 지켜봐야 할 지표(KPI)와 성장 로드맵이 나오고, 기업 가치를 추산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무 예측(financial projection)은 사용자 획득 전략과 시장 규모, 성장에 대한 회사의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역산할 수 있는 장표로서 역할한다.

그래서 '고객이 겪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그 시작점은 모든 결과물의 가치를 사실상 결정 짓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꼭 창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제기구의 합의, 정부 정책의 설계, 언론의 역할, 정당의 존재 모두 그 시작은 누구의 어떠한 문제를 풀기 위한 것에 있었다. 그들이 타깃으로 하는 고객들의 절절한 문제들을 풀지 못한다면 그들의 존재는 제고돼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고객이 만일 처음과 달라졌다면, 방법론은 기존과 달라져야 한다. 가령 과거의 미디어 고객들은 세상을 파악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기꺼이 구독을 했다면, 지금 그 고객들은 알알이 흩어진 정보를 빠르게 소비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현재의 솔루션은 그들이 더 이상 겪지 않는 문제를 타깃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양적으로 줄어든 타깃 고객을 뾰족하게 살피거나, 혹은 새로운 타깃을 대상으로 새로이 문제 설정을 해야할 것이다. 거리에 나선 정당의 행동도, 내년 예산을 계획하는 정부의 움직임도 같은 맥락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에 빚을 지고 있다. 내가 만든 음악은 지나가는 이의 30초를 차지하고, 조금 확대된 고객군에게는 4분30초를 소비하게 하며, 타깃 고객에게는 하루 30분과 그의 20대 중반 초봄을 상징하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그 시간 빚을 의미 있게 갚으려고, 우리는 그토록 골몰해서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작금의 혼란한 상황은 과연 누구의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5000만 국민의 100일 넘는 시간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일까. 그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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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 사진 유재연 옐로우독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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