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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U 작동 방식을 구현한 로봇 /사진=엔비디아 유튜브2009년 12월 엔비디아 유튜브 계정에는 흥미로운 실험 영상이 올라왔다. '호기심 해결사 데모 GPU 대 CPU'(Mythbusters Demo GPU versus CPU). 미국의 인기 실험 프로그램 호기심 해결사의 호스트가 직접 GPU(그래픽처리장치)와 CPU(중앙처리장치)를 비교하는 영상이다.
영상 속 무대 위 GPU와 CPU를 구현한 두 대의 로봇이 캔버스를 바라보고 서있다. CPU 로봇은 스마일 이모티콘을 완성하는데 10초, GPU 로봇은 모나리자를 완성하는데 1초도 안 걸렸다. 명령을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CPU와 병렬적으로 처리하는 GPU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CPU 작동 방식을 구현한 로봇(위)과 GPU 작동 방식을 구현한 로봇이 각각 스마일과 모나리자를 그렸다. CPU 로봇이 스마일을 그리는데는 10초, GPU 로봇이 모나리자를 그리는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진=엔비디아 유튜브해당 영상은 AI(인공지능)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됐다. 엔비디아의 GPU는 범용 컴퓨팅 아키텍처 '쿠다'(CUDA)를 통해 빠르게 AI 연구개발(R&D)에 활용됐고, AI 성능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2018년 첫 등장 당시 1억1700만개(GPT-1)에 불과했던 오픈AI GPT의 파라미터 수는 현재 1750억개(GPT-3.5)로 늘었다. 단순 비교하면 7년새 AI의 데이터 처리 속도가 1000배 빨라진 셈이다.
엔비디아가 선보인 AI 혁신을 뛰어넘을 혁신기술 양자컴퓨터(양자컴)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중첩과 얽힘이라는 양자역학적 특성을 활용한 컴퓨터로 0과 1로 이뤄진 기존 컴퓨터와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다. 성능은 기존 GPU를 압도한다. 엔비디아의 AI 특화 GPU 'H100'과 구글의 QPU(양자처리장치) '윌로우'(Willow)를 초당 비트로 환산해 비교하면 윌로우가 1000만배 더 빠르다.
공상과학소설(SF) 속 얘기 같은 양자컴은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구글과 글로벌 제약사 베링거인겔하임은 양자컴을 이용해 알츠하이머 진단모델 개발에 큰 진전을 보였다. JP모건체이스는 양자컴을 이용해 24시간 걸리는 옵션가격 계산을 15분으로 줄였다.
양자컴 상용화가 완료되면 여러 분야에서 지난 16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진전이 예상된다. 양자컴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미래를 예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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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얽힘과 중첩…25억년 걸릴 문제 단 200초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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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중첩과 얽힘의 개념/그래픽=이지혜양자컴을 이해하려면 우선 양자역학적 특성부터 알아야 한다. 중첩과 얽힘이다. 중첩은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논리다. 간단한 예로 동전이 돌아가는 상태를 들 수 있다. 동전의 앞면을 0, 뒷면을 1으로 가정할 때 돌아가고 있는 동전은 0인 동시에 1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얽힘이다. 두 개 이상의 입자가 서로 강하게 연결돼 한 입자의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시 결정되는 현상이다. 이론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라도 서로 얽혀 영향을 받는다. 이런 양자역학적 특성은 양자컴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에서도 나타난다.
큐비트는 중첩 특성으로 0과 1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다. 이 때문에 데이터 처리도 2의 승수로 하게 된다. 예를 들어 2개의 큐비트를 00, 01, 10, 11의 4가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얽힘 특성은 두 개의 큐비트를 서로 연결해 각각의 조정 없이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같은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양자컴은 기존 컴퓨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극적인 예로 중국과학기술대학이 2020년 학술지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76큐비트 양자컴 '구장'(Jiuzhang)이 광자의 위치 확률 분포를 계산하는 보손 샘플링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린 시간은 200초다. 이를 슈퍼컴퓨터로 풀 경우 대략 25억년의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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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화 마일스톤 '트리플나인'…'게임체인저' 중성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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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컴(2 큐비트 기준) 신뢰도 주요 기록/그래픽=윤선정김영무 카카오벤처스 심사역은 "양자컴 상용화에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신뢰도 △확장성 △비용"이라며 "얼마나 많은 입자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합리적인 가격에 정확도가 높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양자컴 상용화와 관련해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뤄졌다"며 "우선 양자컴의 신뢰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9월 미국 양자컴 기업 아이온큐는 바륨 이온을 이용한 2큐비트 양자컴의 신뢰도 99.91%을 달성했다. 일본 도시바와 이화학연구소도 2큐비트 양자컴에서 신뢰도 99.9%를 달성했다. 상용화 최소 요건인 이른바 '트리플 나인'(99.91%)이다.
4년 전인 2020년(99.2%)과 비교하면 별다른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얘기가 다르다. 신뢰도 99.9%인 2큐비트 양자컴이 100번 연속 동일한 연산을 했을 때 정확도는 90.48%다. 반면 신뢰도 99.2%의 경우 정확도는 44.77%로 뚝 떨어진다.
김 심사역은 "양자컴의 신뢰도가 이렇게 높아질 수 있었던 건 하드웨어 안전성이 대폭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초전도체 양자컴의 경우 입자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냉각 기술이, 이온트랩과 중성원자 양자컴의 경우 입자를 조작하는 레이저 기술이 크게 개선됐다.
미국 큐에라에서 개발한 중성원자 양자컴 '아퀼라' /사진=큐에라이중 중성원자 양자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일단 초전도체나 이온트랩 방식과 달리 냉각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필요할 때 입자만 레이저로 냉각하면 되기엔 비용면에서 유리하다.
확장성면에서도 유리하다. 초전도체 양자컴이 큐비트를 늘리려면 입자가 통과할 초전도체 루프를 추가해야 한다. 초전도체 양자컴을 보면 여러 개의 긴 줄이 줄줄이 달려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온트랩 양자컴의 경우 이온 입자 간에 일정 간격을 두고 배치해야 하기에 큐비트를 극적으로 확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중성원자 양자컴은 진공 쳄버 내 입자를 레이저가 얼마나 많이 잡을 수 있느냐가 큐비트 수를 결정한다. 레이저의 강도를 늘리면 그만큼 큐비트도 늘어나는 방식이다.
실제 중성원자 양자컴은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지 불과 5년만에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였다. 안재욱 카이스트(KAIST) 교수는 "실험실 단계이긴 하지만 2024큐비트를 기록했다"며 "15년 이상의 개발 격차가 있는 초전도체 양자컴(어닐링 방식)의 큐비트가 5000개 정도인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지금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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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파급효과 245조…가장 큰 숙제 '범용성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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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컴 도입으로 기대되는 특이점/그래픽=이지혜양자컴의 등장은 다양한 산업군에 큰 파급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컨설팅사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2040년 양자컴 시장 규모는 900억~1700억달러(129조8610억~245조2930억원), 양자컴이 미칠 경제적 파급력은 이보다 50배 큰 4500억~8500억달러로 전망했다.
양자컴은 크게 3개 영역에서 기술적 특이점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시뮬레이션, 최적화, 머신러닝 등이다. 각 분야별 주요 산업을 살펴보면 시뮬레이션은 △제약 △우주항공(전산유체역학) △화학 △에너지 △금융(파생상품 가격결정) 등이 있다. 최적화는 △금융(포트폴리오 최적화) △보험 △물류 △우주항공(항로 최적화), 머신러닝은 자율주행 알고리즘이다.
이중 가장 빠르게 양자컴 기술이 적용되고 있는 분야는 금융과 물류다. 포트폴리오와 물류 네트워크 최적화 과정에서 고려되는 복잡하고 수많은 변수를 양자컴이 빠르게 계산하고 있다.
실제 글로벌 금융기업 크레디아그리콜은 프랑스 양자컴 기업 파스칼과 손잡고, 양자컴 기술을 금융상품 가치와 신용위험을 평가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JP모건체이스는 퀀티넘, QC웨어, 도시바 등과 함께 복잡한 금융시스템과 알고리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양자컴을 이용하고 있다.
물류 분야에서는 엑손모빌이 IBM과 협력하고 있다. 두 회사는 컨테이너를 최대 2만개까지 실을 수 있는 거대 화물선 5만대의 물류 네트워크를 최적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IBM은 양자컴을 활용해 미국 뉴욕 1200곳의 배송 최적화 경로를 구현, 30분대 배송이 가능토록 했다.
양자컴의 역할이 가장 기대되는 곳 중 하나는 AI 분야다. 현재 AI 개발은 하드웨어 병목현상에 직면해 있다.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AGI(범용인공지능) 완성을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하지만, GPU 중심의 현 하드웨어로는 짧은 시간 내 실현이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양자컴이 직접적으로 AI 개발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바로 범용성이다. 현재 금융과 물류 분야에 활용되는 양자컴은 대부분 어닐링 방식이다. 실제 입자를 물리적으로 조작해 시뮬레이션 하는 방식이다. 양자역학적인 소양이 필수다. 이 때문에 입자 상태를 디지털화해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번역기인 게이트웨이의 발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