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기업가치 10억달러(한국에선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일컫는 '유니콘'의 시대가 저무는 걸까. 202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유니콘의 씨가 마르고 있다. 기존 유니콘의 경우 경기에 민감한 플랫폼 업체들이 많다보니 다양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양적·질적 성장에서 경고등이 들어온 한국 유니콘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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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딥테크 스타트업/그래픽=이지혜국내 AI반도체 스타트업퓨리오사AI가메타와 매각 논의를 진행하는 가운데 국내 벤처투자, 특히 딥테크 투자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유망한 딥테크 스타트업들이 제 때 스케일업 자금을 수혈받지 못해 해외로 플립(본사이전)하거나 매각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이에 딥테크 육성에 맞는 전용 정책펀드를 조성하고 대기업의 적극적인 M&A(인수합병)를 유도하기 위한 규제 개선 등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퓨리오사AI는 올해 초 메타와의 인수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 국내에서 투자유치를 진행했다. 양산 제품의 개선 및 영업을 위해 600억~800억원가량의 운영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투자유치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직 연매출 100억원도 안 되는 상황에서 8000억원에 육박하는 기업가치에 투자할 투자사들이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퓨리오사AI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000억원 이상 투자를 유치한 딥테크 스타트업은 △리벨리온 △업스테이지 △딥엑스 등 3곳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 중 딥테크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 리벨리온, 메가존클라우드 등 2곳에 그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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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 독일·프랑스급 규모지만…딥테크 투자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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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및 한국 벤처투자 규모/그래픽=이지혜국내 벤처투자 규모 자체가 작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11조9000억원(82억달러)을 기록했다. 미국(2090억달러), 영국(175억달러), 이스라엘(122억달러), 캐나다(89억달러)보다는 낮지만, 독일(81억달러), 프랑스(77억달러) 등과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투자 환경은 딥테크 스타트업에 친화적이지 않다. 대표적인 게 펀드 만기다. 국내 벤처펀드 다수는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이 제시하는 '만기 7~8년' 펀드를 표준으로 여기고 있다. 본격적인 성장과 이익 발생에 10년 이상이 걸리는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했다간 만기 내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다.
만기된 펀드의 지분을 구매해줄 '세컨더리' 시장이 크지도 않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벤처펀드 대비 세컨더리펀드 비중은 17.6%로, 전세계 평균(24%)보다 작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VC(벤처캐피탈)들이 단순히 국내 딥테크를 못 믿거나 위험투자를 기피하는 게 아니다"며 "성장부터 회수까지 시점이 짧은 기업들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비교적 투자 기간의 제약이 적은 대기업 및 CVC(기업형 벤처캐피탈)가 있지만, 아직 규모가 작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CVC 투자 규모는 1764억원으로 전체 벤처투자의 1.6%에 그쳤다. M&A도 활발하지 않다. 삼일회계법인은 2023년 대기업의 중소기업 M&A가 26건 2조2000억원이라고 밝혔다. 1건당 평균 1000억원도 안 되는 규모다.
한 VC 심사역은 "통상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대기업 임직원들이 퇴사 후 설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보고 대기업들은 '남은 직원들도 회사에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볼 때가 많다"고 했다. 반도체 스타트업 대표는 "대기업들은 해외 딥테크 스타트업을 더 고평가한다"며 "이른바 '기술 사대주의'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업계가 꼽은 딥테크 투자의 한계점/그래픽=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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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펀드 조성·대기업 규제 완화…수단·방법 가릴 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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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선 딥테크를 위한 전용펀드나 투자규제 완화 등이 해결책으로 거론된다. 이에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첨단산업 국민펀드 등도 업계에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규모나 운영 방안 등에 대해선 이견이 있겠지만, 딥테크 육성을 위한 전용 펀드는 필요하단 설명이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정치 논리를 떠나 딥테크 산업 육성 측면에서 첨단산업 펀드 등이 논의되는 것은 건전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딥테크 스타트업의 성장 공식이 일반적인 스타트업들과 다른 만큼 특화 펀드가 필요하다"며 "글로벌 기술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고 했다.
주요국 외국자본 벤처펀드 출자비중/그래픽=이지혜외국 자본의 한국 패싱 현상도 선결 과제로 꼽힌다. 딥테크 산업을 키우려면 글로벌 자금의 대규모 투자가 반드시 필요한데 한국은 소외돼 있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프레퀸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해외 주요국의 외국 자본 벤처펀드 출자 비중은 인도 87%, 싱가포르 84%, 영국 74%. 독일 66% 등에 달한다. 한국은 2.1%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M&A 활성화를 위한 제도 및 여론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공정거래법에 따른 기업결합 심사, CVC의 외부 출자금 활용 한계 등 규제로 국내 스타트업 투자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투자에 대해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보는 부정적 여론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