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998년 벤처기업육성특별법 도입 후 국내 창업생태계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질적인 면에선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수도권 쏠림은 심화하고, 글로벌화는 더디기만 하다. 전문가들은 창업이 경제를 이끄는 동력으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창업생태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국가 차원을 넘어 지역 단위 맞춤형 창업생태계를 구축, '글로벌 창업도시'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유니콘팩토리가 다각도로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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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류준영 기자 "현대차그룹 계열사가 160억원에 인수를 추진했지만, 도요타 투자 계열사인 우븐캐피탈이 400억원을 제시하며 판이 뒤집혔죠."
최근 방문한 대구 최대 창업보육센터 '대구스케일업허브(DASH)' 6층. 신한스퀘어브릿지 대구 관계자는 'ESG 인큐베이션 2기' 벽보를 가리키며 이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공은 2017년 설립된 '엘디카본'. 폐타이어에서 친환경 방식으로 카본블랙을 추출하는 기술을 보유한 이 기업은, 연간 30만톤 이상 발생하는 폐타이어 문제 해결과 생산비 절감이라는 이중 효과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문종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투자성장실장은 "이지스(3D 지리정보시스템)가 150억원을, 인터엑스(제조 AI·자율형 공장 솔루션)가 170억원을 유치하며 대구 수성알파시티로 본사 이전을 결정하는 등 낭보가 이어지고 있다"며 "엘디카본처럼 IPO(기업공개)를 준비 중인 기업들도 많아 예탁결제원 등 유관기관의 관심이 높다"고 밝혔다.
대구시는 기존 섬유·중화학 산업 기반 위에 ABB(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로봇, 반도체, 모빌리티, 헬스케어 등 5대 신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업생태계를 혁신해 딥테크(첨단기술) 스타트업 유치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유니콘팩토리는 중소벤처기업부 및 지역 핵심 관계자들과 함께 대구 창업생태계의 현황과 가능성을 다각도로 조망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발간한 '대구 창업생태계 리포트'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대구의 기술 기반 창업기업 수는 8146개에 달한다. 대구스케일업허브(DASH)를 포함한 공공 창업 인프라는 20곳, 관련 인프라를 갖춘 대학도 12개교에 이른다. 삼익THK, 삼보모터스, 에스엘, 아이엠뱅크 등 지역 중견기업과 스타트업 간 협력을 유도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사업도 활발히 전개 중이다.
또 '제2의 판교'로 불리는 수성알파시티를 중심으로 AI 기업과 인프라가 집적돼 있으며, 첨단복합의료단지, 모터소부장 특화단지, 국가로봇테스트필드, AI·로봇 글로벌 혁신특구 등 특화 인프라가 대구의 창업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기반 속에 대구 창업기업의 4년 생존율은 42.2%(2023년 기준)로 전국 2위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정부의 창업 지원사업 참여기업의 평균 매출은 10억2600만원(연평균 22.8% 증가), 평균 투자유치액은 13억300만원(연평균 23.5% 증가)으로 성장세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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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서울' 넘는다..창업·투자생태계 조성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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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서울'은 자금 조달을 위해 결국 수도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지역 스타트업의 현실을 반영한 표현이다. 그러나 최근 대구는 자생적인 창업·투자생태계 조성을 위한 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3년 기준 대구에서 결성된 주요 펀드는 대구형 그린뉴딜펀드(190억 원), 연구개발특구 지역혁신펀드(606억 원) 등을 포함해 총 4867억원 규모다. 민선 8기 이후에는 '지역혁신벤처펀드', 'ABB성장펀드' 등 전략 펀드를 추가로 조성하며 투자 기반을 더 확장하고 있다. 현재 대구에는 인라이트벤처스, 대덕벤처파트너스, 삼본투자파트너스를 포함한 9개 벤처캐피탈(VC)과 14개 액셀러레이터(AC)가 본사 또는 지사 형태로 활동하며, 유망 스타트업 발굴과 초기 투자에 힘쓰고 있다. 다만, 일부 투자사는 지사만을 운영하고 있어 회수·재투자·기업 유치 전략 측면에서 지역 밀착형 투자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펀드 회수금이 다시 지역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 마련과 지역 내 VC·AC에 대한 정책적 인센티브 강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김선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장은 "지역 이해도가 높은 투자사를 중심으로 펀드를 설계하고, 지역 산업에 맞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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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생기업 생존율 전국 상위권...인재 유출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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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창업생태계의 강점 중 하나는 높은 기업 생존율이다. 4년차 생존율은 42.2%로 전국 2위이며, 1~7년 차 생존율도 모두 전국 평균을 웃돈다. 김우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연구진흥팀장은 "제조업과 특허 중심의 기술 기반 창업이 많아 생존율이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기술 창업의 중심지는 '비슬밸리'로 불리는 달성군 남부 지역이다. DGIST를 비롯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생산기술연구원, 기계연구원 등이 밀집해 있으며, 국가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돼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다. 다만, 인재 확보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대구 소재 한 스타트업 대표는 "기업 인지도가 낮아 우수 인재 영입이 어렵다"며 "요즘엔 판교도 기피하는 분위기인데 대구까지 오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구에는 계명대, 대구가톨릭대를 포함한 12개 대학이 있지만, 졸업생과 교수진의 수도권 이탈이 지속되며 우려를 낳고 있다. 이에 대해 대구시는 "지난해 4월 대학정책 전담 조직인 '대학정책국'을 신설해 지역 산업과 연계한 인재 양성 체계를 마련했다"며 "반도체(경북대), 모빌리티(계명대) 등 전략산업과 대학의 특화분야를 연결해 현장 중심의 신산업 인재를 집중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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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헬스케어 허브 도약, '연결'이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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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메디허브 전임상센터 전경/사진=케이메디허브
대구시는 2009년 조성된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를 중심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을 지역 창업생태계의 핵심 성장축으로 육성하고 있다. 약 2만1200여명의 의료 인력과 경북대·영남대·계명대 등 의과대학 밀집은 의공학 기반 창업과 바이오·의료기기 스타트업 성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가받는다.
정부도 대구를 바이오 혁신거점으로 육성 중이며, 신서 혁신도시 내에는 바이오 클러스터 'K-메디허브'가 구축돼 있다. 국내 유일의 뇌연구기관인 한국뇌연구원도 대구에 위치해, R&D 기반 딥테크 창업 확산 가능성도 크다.
다만, 우수한 인프라에 비해 기관 간 유기적 연결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각 기관의 역량은 뛰어나지만 상호 협력과 연계가 아쉽다는 것이다. 이에 대구시는 "산·학·연·병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구창업혁신협의회'를 구성해 지역 내 대학, 기업지원기관, 산업별 전문기관 간의 연결고리를 촘촘히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