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부진에 M&A 매물 전락
56년 역사상 전례없는 위기
반독점 시사 등 성사 불투명
기업가치 기준으로 한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반도체 제왕' 인텔이 경쟁사인 퀄컴에 매각될 위기에 놓였다. 극심한 경영난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돌입한데 이어 인수·합병(M&A) 매물로 전락한 것은 인텔의 추락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거래가 성사될지는 미지수지만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피인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 만으로도 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는 해석도 나온다.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퀄컴이 최근 며칠간 인텔에 인수를 타진했다고 보도했다. 인텔의 현재 시가총액은 20일 기준 약 932억달러(약 124조5000억원)다. 이 거래가 성사될 경우 최근 수년간 이뤄진 테크업계 M&A 중 가장 크고 중요한 M&A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액티비전블리자드를 690억달러(약 92조2000억원)에 인수한 것이 최대 규모다.
스마트폰용 반도체를 주로 설계하는 퀄컴이 개인용컴퓨터(PC)용 반도체인 중앙처리장치(CPU) 제조에 특화된 인텔을 인수하려는 건 사업 영역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퀄컴이 인텔을 품을 경우 모바일과 PC, 인공지능(AI)용 반도체까지 사업 품목으로 편입하게 된다. 현재 퀄컴의 자산이나 매출액 규모는 인텔보다 작지만 시가총액은 1880억달러(약 251조원)로 인텔의 2배에 달한다.
다만 퀄컴의 인텔 인수는 쉽지 않다는 진단이다. 인텔이 퀄컴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규제 당국의 엄격한 반독점 심사 등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7년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2021년 엔비디아의 ARM 인수 등 앞서 당국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무산된 M&A 사례가 있다. 퀄컴이 반독점 제재를 피하려면 인텔의 일부 자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퀄컴이 인수 제안에 나선 배경에는 인텔의 심각한 재정 상태가 있다. 인텔은 1970년대부터 50년 가까이 PC용 반도체인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장악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모바일 중심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최근 수년간 급격히 진행된 AI 시장 트렌드도 따라가지 못했다. 급기야 지난달엔 16억달러(약 2조1000억원) 순손실이라는 사상 최악의 2분기 실적을 공개했다.
인텔은 실적 악화의 주범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 분사, 독일·폴란드 공장 건설 중단, 전체 직원의 15% 구조조정 등을 단행하기로 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20일 인텔 주가는 21.84달러로 올 들어서만 50% 넘게 빠졌다. 최고점이던 2020년초 주가와 비교하면 70% 가까이 낮은 수준이다. WSJ는 "경영진의 전략적 실수와 AI 열풍이 미국을 대표하던 반도체 회사인 인텔을 피인수 기업으로 전락시켰다"며 "인텔은 56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초 생산에 들어갈 1.8나노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의 성공 여부에 인텔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봤다. 인텔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 내년에 각각 2나노 공정에 들어가는 TSMC나 삼성전자에 앞서 1나노대에 진입하게 된다. 스테이시 라스곤 번스타인리서치 애널리스트는 "인텔의 미래는 내년에 생산될 차세대 칩 제조 기술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며 "기술 리더십을 회복하면 수익성을 개선하고 고객들의 신뢰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기자 사진 송지유 기자
- 기자 사진 뉴욕=박준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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