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안할래" 엘리트 코스 밟고도 '비인기' 의과학자 변신한 이유

박건희 기자, 정심교 기자 기사 입력 2024.04.0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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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의사 2000명 vs 의과학자 0명(하)

[편집자주] 정부와 의사단체의 정면 충돌 틈바구니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국정과제가 있다. 대통령이 여러 번 강조했던 '의과학자 양성'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 'K-방역'이 주목받았지만, 감염병의 게임체인저는 미국·유럽의 백신이었다. 의료 서비스는 앞섰지만 의학은 뒤처진 한국이 의과학자를 주목한 계기다. 그러나 연 2000명 의대 증원에 의과학자 몫은 없다. '임상과 연결된 의과학' 언급은 현상 유지와 다름 아니다. 의료개혁 막판 협상에 의과학자 양성이 다뤄져야 할 이유다.


과학고→서울대 의대→KAIST…스타트업 뛰어든 과학 영재들




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이노크라스' 한국 본사에서 만난 고준영 희귀질환 디렉터(왼쪽), 이정석 이노크라스 공동창업자 겸 CIO(최고혁신책임자) (가운데),  오백록 CPO(최고제품책임자) (오른쪽) /그래픽=이지혜
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이노크라스' 한국 본사에서 만난 고준영 희귀질환 디렉터(왼쪽), 이정석 이노크라스 공동창업자 겸 CIO(최고혁신책임자) (가운데), 오백록 CPO(최고제품책임자) (오른쪽) /그래픽=이지혜
"'의과학자는 장래가 없다'지만, 그 '장래'가 되고 싶어요. 의과학 연구의 길을 택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가 나와야 미래 세대도 꿈을 꿉니다."

소위 '정석' 엘리트 코스를 밟고도 '비인기 종목'을 택한 의과학자들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 과학고를 졸업해 의대로 진학, 대학병원에서 내과, 소아청소년과, 안과 등 진료를 봤던 의사(MD)들이다. 이들은 현재 인간의 모든 유전자 서열을 완벽히 분석해 암·희귀질환 등의 진단법을 만드는 의과학자로 변신했다.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이노크라스(INOCRAS) 한국 본사에서 세명의 의과학자들을 만났다.

◆ '의대 열풍'에 선택한 의사의 길… 결국 '희귀질환 연구'로 돌아왔다

이정석 이노크라스 공동창업자 겸 CIO(최고혁신책임자)는 "의사가 되기 싫었다"고 했다. 자연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2000년 서울과학고를 조기 졸업(수료)해 KAIST(카이스트) 화학과로 진학했다. 화학이 재미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다시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주변 과학고 졸업생들이 대부분 의대로 진학한 모습을 보면서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에 대한 내신비교평가제가 폐지돼 '서울대 못 갈 바에 타대 의대가 낫다'는 인식이 퍼질 때였다.

내과 레지던트 4년 차 시절, 이 CIO는 '희귀질환을 앓는 어린아이의 유전체를 분석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마침 주영석 이노크라스 공동창업자(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가 최초로 한국인의 전장유전체를 해석해 세상에 내놨을 때였다. 이 CIO와 주 교수는 한 달간 분석에 돌입해 희귀질환의 원인이 되는 유전적 실마리를 끝내 알아냈다. 그는 "당시엔 희귀병 환자 1명에게 도움이 됐지만, 언젠간 누구나 유전체를 분석해 질병을 예측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이 2020년 설립한 이노크라스는 개인의 전장유전체(WGS·whole-genome sequencing)를 분석해 암, 희귀질환 등의 유전적 요인을 알아내는 '유전체 진단 솔루션' 스타트업이다. 암세포 표적치료제 반응 예측이 대표적이다. 암은 돌연변이 유전자에 의해 발생한다. 특정 암 환자의 DNA를 뽑아 염기서열을 분석, 특정 표적 치료제를 투여해도 무방할지 빠르게 예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유전체의 특정 부분만 들여다보고 치료제의 반응을 예측하는 '타깃 시퀀싱 패널(Targeted Sequencing Panel)'이 널리 활용됐다면, 이들은 유전체 전체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WGS 원천기술을 상용화 단계까지 끌고 왔다.

◆ 의과학자 키워도 '일자리' 보장 못하는 현실… "그래서 시작했다"

오백록 CPO(가운데)는 "연구와 진료를 도무지 병행할 수 없어 교수직을 던지고 이노크라스 연구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사진=박건희 기자
오백록 CPO(가운데)는 "연구와 진료를 도무지 병행할 수 없어 교수직을 던지고 이노크라스 연구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사진=박건희 기자
고준영 희귀질환 디렉터는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을 들여 WGS 기술의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었다"면서 "하지만 유전체 분석 기술을 실제 암 치료 등 헬스케어산업과 접목하는 데는 우리가 앞설 수 있다. 기업은 시장원리로 움직이는 만큼, 의료계 수요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CIO는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이면서, 그 기술이 실제 현장에서 왜, 어떻게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의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고 디렉터는 "의과학자란 별칭을 붙일 필요도 없이, 양쪽의 현장을 오가며 '차세대 기술력은 어디서 나올까'를 고민하는 연구자"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전세계 헬스케어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이렇게 좁은 국내에서 '연구하는 의사'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오백록 CPO(최고제품책임자)는 "의과학자가 학교 밖 일자리를 찾기 힘든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애써 의과학자를 키워내도 관련 산업이 성장하지 않으면, 이들은 국내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우수 인력의 해외 유출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다.

이 CIO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산업계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과학자의 길에는 장래가 없다지만, 그 '장래'가 되고 싶다. 의과학자의 길을 가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웰컴트러스트 재단의 후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유전체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영국 생어연구소처럼, 언젠가 미래 세대를 위한 연구소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돈 안 되고 힘든데…누가 해" 의대정원 늘려도 의과학자 없을 거란 의사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3월 12일 서울 노원구 한국원자력의학원을 방문해 수술실에서 의료진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3월 12일 서울 노원구 한국원자력의학원을 방문해 수술실에서 의료진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의대 2000명 증원책'을 놓고, 정부와 의사들이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정작 이번 논의에서 '의과학자(의사이면서 과학자) 인력 부족' 문제는 쏙 빠진 모양새다. 정부와의 기 싸움에 나선 의사 집단 대부분이 병원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로 구성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의과학자를 지금보다 더 많이 배출해야 하는 건 맞다"면서도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의과학자가 많아지는 건 아니다"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과학자의 길을 걷는 가천대 의대 길병원 신경외과 이언 명예교수(이메디헬스케어 대표)는 "의과학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해선 의대 정원부터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이 과학을 연구하고 싶도록 환경을 만드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을 연구하고 싶은 환경이 아닌데 의대 정원 늘린다고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많겠냐는 것이다.

그는 2년여 전, 정년퇴직한 후 IT 전문가들과 공동 창업했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 2월 손가락에 끼는 반지로 24시간 내내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스마트링(바이탈링)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해 선보였다. 손가락 동맥을 통해 △수면 상태 △스트레스 △피부 온도 △심박수 △호흡수 △혈중산소농도 △활동량을 24시간 내내 모니터링하고, 이상 신호를 의사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그간 첨단과학에 꾸준히 관심가지며 공부했기 때문에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명예교수는 길병원 인공지능기반정밀의료추진단장으로 몸 담았던 2016년 당시, 국내 최초로 IBM의 인공지능 의사 '왓슨 포 온 콜로지'를 길병원에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로선 의사 중에서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공부하며 IT·인공지능 등 최첨단 과학기술을 터득하는 데 그친다"며 "의과학 연구 환경이 조성된 후 의대 커리큘럼에 과학을 녹여 의대인지 과학인지 헷갈릴 정도가 돼야 의과학자 양성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해외에선 이미 다양한 의사과학자 양성 모델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의사는 평생 환자 수만 명을 치료하지만 의과학자(MD-phD)는 수억 명을 살릴 수 있다'는 데 주목해서다. 미국 칼 일리노이 공대는 세계 최초로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해 공학 원리를 적용한 의학을 교육한다. 또 하버드의대는 1971년 기존의 의대교육 과정과 별도로 MIT와 공동 운영하는 HST(Health Science and Technology)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기존 의대를 운영하면서 연구 프로젝트 중심의 'Duke-NUS 메디컬 스쿨'을 신설해 기초의학 기반 의과학자와 공학·과학 기반 의과학자 양성을 병행하고 있다.

(포항=뉴스1) 최창호 기자 = 김성근 포스텍(포항공대)총장이 1일 교내 회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의사과학자 양성에 필요한 연구중심의대설립 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 총장은 연구중심의대 설립과 관련 "포스텍이 지역 주민들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동의한다. 다만 의대 신설은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의대 신설애 필요한 다양한 요건들이 충족됐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4.4.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 /사진=(포항=뉴스1) 최창호 기자
(포항=뉴스1) 최창호 기자 = 김성근 포스텍(포항공대)총장이 1일 교내 회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의사과학자 양성에 필요한 연구중심의대설립 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 총장은 연구중심의대 설립과 관련 "포스텍이 지역 주민들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동의한다. 다만 의대 신설은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의대 신설애 필요한 다양한 요건들이 충족됐을 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4.4.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 /사진=(포항=뉴스1) 최창호 기자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의과학자를 양성해도 결국엔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임상 의사로 빠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양대병원 외과 최동호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의과학자를 배출해도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한 데다, 보수나 대우가 병원의 임상의사보다 아주 낮아 의사과학자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의대 증원을 늘려 의과학자까지 늘린다고 해도 의과학자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란 견해다. 필수의료·지방의료·의과학자 모두 다 '어려우면서도 돈이 안 되는 분야'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의과학자의 여건을 개선하지 않은 채 의대 정원부터 늘려 의사 인력이 많아지면 '편한 분야'로 더 많이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자 가운데 의학 연구에 종사하는 인력보다 개원하는 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게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의과학자 A 교수도 "돈 안 되고 힘들면 누가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 하겠는가"라며 "이공계생들이 이공계 연구가 열악하고 대우가 나빠 떠나려는 상황에서, 의과학자를 양성한다는 건 의사에게 이공계를 하라고 떠맡기는 격인데 누가 지원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 기자 사진 박건희 기자
  • 기자 사진 정심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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