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의사 2000명 vs 의과학자 0명] ④의과학자 기피하는 의사들
[편집자주] 정부와 의사단체의 정면 충돌 틈바구니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국정과제가 있다. 대통령이 여러 번 강조했던 '의과학자 양성'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 'K-방역'이 주목받았지만, 감염병의 게임체인저는 미국·유럽의 백신이었다. 의료 서비스는 앞섰지만 의학은 뒤처진 한국이 의과학자를 주목한 계기다. 그러나 연 2000명 의대 증원에 의과학자 몫은 없다. '임상과 연결된 의과학' 언급은 현상 유지와 다름 아니다. 의료개혁 막판 협상에 의과학자 양성이 다뤄져야 할 이유다.
'의대 2000명 증원책'을 놓고, 정부와 의사들이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정작 이번 논의에서 '의과학자(의사이면서 과학자) 인력 부족' 문제는 쏙 빠진 모양새다. 정부와의 기 싸움에 나선 의사 집단 대부분이 병원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로 구성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의과학자를 지금보다 더 많이 배출해야 하는 건 맞다"면서도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의과학자가 많아지는 건 아니다"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과학자의 길을 걷는 가천대 의대 길병원 신경외과 이언 명예교수(이메디헬스케어 대표)는 "의과학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해선 의대 정원부터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이 과학을 연구하고 싶도록 환경을 만드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을 연구하고 싶은 환경이 아닌데 의대 정원 늘린다고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많겠냐는 것이다.
그는 2년여 전, 정년퇴직한 후 IT 전문가들과 공동 창업했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 2월 손가락에 끼는 반지로 24시간 내내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스마트링(바이탈링)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해 선보였다. 손가락 동맥을 통해 △수면 상태 △스트레스 △피부 온도 △심박수 △호흡수 △혈중산소농도 △활동량을 24시간 내내 모니터링하고, 이상 신호를 의사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다. 그간 첨단과학에 꾸준히 관심가지며 공부했기 때문에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명예교수는 길병원 인공지능기반정밀의료추진단장으로 몸 담았던 2016년 당시, 국내 최초로 IBM의 인공지능 의사 '왓슨 포 온 콜로지'를 길병원에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로선 의사 중에서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공부하며 IT·인공지능 등 최첨단 과학기술을 터득하는 데 그친다"며 "의과학 연구 환경이 조성된 후 의대 커리큘럼에 과학을 녹여 의대인지 과학인지 헷갈릴 정도가 돼야 의과학자 양성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해외에선 이미 다양한 의사과학자 양성 모델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의사는 평생 환자 수만 명을 치료하지만 의과학자(MD-phD)는 수억 명을 살릴 수 있다'는 데 주목해서다. 미국 칼 일리노이 공대는 세계 최초로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해 공학 원리를 적용한 의학을 교육한다. 또 하버드의대는 1971년 기존의 의대교육 과정과 별도로 MIT와 공동 운영하는 HST(Health Science and Technology)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기존 의대를 운영하면서 연구 프로젝트 중심의 'Duke-NUS 메디컬 스쿨'을 신설해 기초의학 기반 의과학자와 공학·과학 기반 의과학자 양성을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의과학자를 양성해도 결국엔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임상 의사로 빠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양대병원 외과 최동호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의과학자를 배출해도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한 데다, 보수나 대우가 병원의 임상의사보다 아주 낮아 의사과학자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의대 증원을 늘려 의과학자까지 늘린다고 해도 의과학자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란 견해다. 필수의료·지방의료·의과학자 모두 다 '어려우면서도 돈이 안 되는 분야'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의과학자의 여건을 개선하지 않은 채 의대 정원부터 늘려 의사 인력이 많아지면 '편한 분야'로 더 많이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자 가운데 의학 연구에 종사하는 인력보다 개원하는 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게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의과학자 A 교수도 "돈 안 되고 힘들면 누가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 하겠는가"라며 "이공계생들이 이공계 연구가 열악하고 대우가 나빠 떠나려는 상황에서, 의과학자를 양성한다는 건 의사에게 이공계를 하라고 떠맡기는 격인데 누가 지원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 기자 사진 정심교 기자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